눈 덮인 들판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서산대사의 雪野 >
한해를 보내며 이때쯤이면 과연 내 앞에 펼쳐졌던 눈길 위에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겼는지 일상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뒷사람의 이정표까지는 아니더라도 흉잡힐 일은 없었는지 혹여 아상만 높진 않았는지
돌이켜 보면 수행자의 본분사보다는 업연(業緣)의 성글기만 더욱 키워 온 부끄러운 일 뿐이다.
말법시대의 수행자는
비산비야(非山非野)에서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사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불멸후 후오백년을 사는 우리에게 상당히 자조(自嘲)적일 수 있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모나지 않고 재주부리지 말라는 경책어로 적절한 말임을 느끼며
무소유 무흔적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처신하고 싶은 것이다.
마치 이 지구에 신세지러 온 사람처럼,,,,,,
눈 덮인 들판 같이 자연의 풍광을 노래한 아름다운 詩는 참으로 많은데
특히 정중한 존댓말의 어투로 시의 서정성을 더하고 있는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는
그 가운데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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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천 팔백 공안도 이렇게 아름다운 구절로 다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연꽃 같은 발꿈치로 못을 뚫는 달빛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흔적 없고 자취 없는 그런 삶을 꿈꾸어 본다.
뜰 앞을 쓰는 대 그림자처럼
먼지 없이 티끌 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