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 명문대가의 명망 높은 선비였던 주굉(1535~1615)은 짧은 시기에 자식과 처, 부모를 나란히 잃고 상심한 마음으로 금강경에 몰두한다.
후처 탕씨가 조용히 놓고 간 찻잔이 엎어져 경전이 다 젖어도 모를 정도였다.
어느 날 어색하게 유지되던 부부사이를 결심한 듯 주굉은 부인을 앉혀 놓고 조용히 이야기 한다.
“사랑의 인연은 너무나 짧고 덧없는 것이오.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부처에게 의지하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라오.”
탕씨 부인은 남편의 마음에 자신이 없다는 것과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을 따르게 마련이지요. 먼저 가세요.”
이때의 심경을 주굉은 폭우가 쏟아지듯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칠필구(七筆句)는 그때 노래한 일곱 가지 끊어야 할 것들이고
주옥같은 스님의 글은 훗날 ‘죽창수필’, ‘선관책진’이라는 책으로 남아 선가의 입문서가 되었다.
스님은 동진 혜원법사의 염불법문을 네 가지로 정리했고 정토종 제8조로 추앙받기도 했는데, 한편 탕씨 부인은 약속을 지키듯 남편의 뒤를 따라 출가해 비구니의 삶을 살다 스님보다 일 년 먼저 생을 마감한다.
칠필구(七筆句).
산언덕의 묘가 아직 때가 아니거늘 어린자식이 먼저 세속의 때를 벗어버리는구나.
하! 일에는 무릇 이유가 있다지만 이 정을 어찌 끊을 것인가. 허나 모든 것이 무상하여라.
그래, 이 정 또한 끊어버리자.
봉황과 난새가 옆에 있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하고 싶으나 언젠가는 이별의 날이 있는 것을.
하! 애틋한 정이 있어도 큰 어려움 앞에 뿔뿔이 흩어지는 모래와 같이 사방으로 제 길을 가게 되니 물과 물고기 같던 부부의 인연을 끊어버리네.
육신은 한갓 작은 부스럼과 같은 것, 자손들을 위해 해준 것이 없도다. 언젠가는 썩을 육신이여 인생과 공덕은 참으로 무상하구나.
하! 오늘 아들손자와의 인연을 여기에서 모두 지워버린다.
사내로 태어나 출중함을 자랑말지니, 위풍당당하던 권세가 얼마나 갈 것인가.
하! 한번 웃음에 모두 일장춘몽이라. 명예와 공명을 모두 잊어버리네.
왕후와 같은 부를 누린다하여 즐거울 것인가.
하! 옥그릇과 비단옷이 무슨 소용이며 큰 저택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늘 저택과 땅을 버린다.
학문이 깊다 말하는가. 예술을 논하고 술과 시를 논하는가.
하! 금색수가 놓인 옷을 입는 영광을 안아보았으나 생사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더라. 오늘 나는 문장을 끊어버리네.
봄을 즐기고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기뻐했노라. 술과 함께 버들가지와 내리는 비를 감상했노라.
하! 하지만 모두 한때의 놀이라, 빛과 어둠이 무상하더라. 오늘 바람과 달과의 인연을 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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