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

새날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

  아마 1980년대 어느 해였을 것이다. 하루는 해외로 급히 나가야 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글 빚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당신이 나가있는 동안 대필해달라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부탁과 함께 그 글에 담을 내용을 자상하게 일러주셨다. 나는 다만 그 말씀을 정리만 하면 되었다. 그때 들려주신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옛날 인도에 어떤 성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언젠가 그 제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은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에 대해 한 제자는 “저 멀리서 먼동이 터서 동창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새날이 온 것을 알지요.”라고 답했고, 어떤 제자는 “사물이 그 형체를 드러내어 산천과 초목이 보이기 시작하면 새날이 밝아온 것을 압니다” 했으며, 또 어떤 제자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와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새날이 온 것을 알게 되지요” 했다.

  이렇게 제자들의 답변이 이어졌고, 스승은 그것을 묵묵히 다 들었다. 답변을 모두 다 듣고 나서 스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니다”라는 한마디만 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밤이 가고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신단 말입니까”하고 따지듯 물었다. 스승은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날이 밝아 너희들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너희 형제들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온 것이니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 우리의 이웃들이 모두 다 형제로 보일 때 새날이 온다는 것이다. 질시와 미움, 미혹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 변해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새날이 온 것을 안다는 것이다. 내 이웃과 주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내 형제들의 그것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새날은 비로소 우리 앞에 온다는 것이다.

2014년에 진실로 우리가 응답할 일은…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나는 새해가 오는 것이 왠지 두렵기만 했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그 사이에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잠을 못 자게 하셨다. 하지만 내가 새해가 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은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갑오(甲午)년은 우리 역사에서 따사롭게 기억되는 해는 결코 아니다. 120년 전, 1894년 갑오년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시작해서 청일전쟁으로 끝난 해였다. 갑오년은 아니지만 100년 전인 1914년에는 1천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였다. 거기다 중국의 굴기, 일본의 경직성 우경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한 사태 등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동북아의 국제 정치환경은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이, 대한제국의 말년을 방불케 하고 있다.

  안으로 세상은 또 얼마나 살벌한가. 염려했던 철도파업이 22일 만에 일단 멈추어 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분위기가 또 무슨 사태를 불러올지 몰라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다. 교수신문이 2013년을 마무리하는 사자성어로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거꾸로 간다)를 선정했다더니, 과연 도처에서 도행역시에 따른 항의와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이 대학가를 넘어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이름 석자 내걸고 대학생들이 붙인 대자보에는 그 동안 삶에 찌들고 스펙쌓기에만 몰두해 사회적 이슈나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했던 자신들을 반성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런 것들을 더는 차마 외면할 수 없다는 배려와 연민을 담고 있어 어떤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그 물음은 2014년에도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여, 그래서 새해는 결코 두루 안녕치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하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여야 간에 내세웠던 정치대탕평이니, 경제민주화니, 국민대통합이니 하던 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들어가 버린 지 오래다. 갑(甲)이 을(乙)을 배려하고 없는 자, 잃은 자, 약한 자를 껴안자던 얘기도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어느덧 이 나라 이 공동체는 두 개의 국민으로 나누어져 내부의 전쟁에 휘말리고 있다. 그리고 두 진영 간에는 증오와 저주, 집단의식과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언론 역시 두 패로 나누어져 하루 종일 미움을 선동하고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국민 내부의 상충하는 권익을 공동선의 방향으로 조정해야 할 정부는 어느 한 편의 집행기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 해 동안 있었던 이런 미망에서 벗어나 2014년에 우리가 진정 가야 할 길은 국민 내부의 화해와 통합이다. “화해는 공동선과의 화해이어야 하며, 독선에 반대하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아량이어야 하며, 전횡을 일삼아온 강자가 억압에 찌든 약자에게 먼저 청해와야 하는 것이다(지학순 주교의 옥중편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형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진정 없는 것 일까. 진짜 새해는 우리 모두가 국민 내부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다른 한쪽을 끌어 안을 때 비로소 찾아올 것이다.
                                                                                    김 정 남 (언론인)